들어가며
솔직히 나는 처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좀 충격받았다.
“나는 꽤 평범한 프로그래머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군지 알면 더 황당하다. 전 세계 PHP 개발자 61%가 쓰는
프레임워크를 만든 사람. 13년간 부트스트랩으로 버티다 Accel로부터 시리즈 A
투자를 받은 사람. 라라벨(Laravel)을 만든 테일러 오트웰(Taylor Otwell)이다.
근데 그가 팟캐스트에서 꺼낸 말은 “영리하게 코딩하는 개발자를 조심하라”였다.
뭔가 거꾸로 가는 것 같은데, 들어보면 이게 진짜 맞는 말이다.

라라벨이 뭔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라라벨은 PHP 기반 웹 프레임워크다. 쉽게 말하면 웹 서비스를 빠르게 만들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 묶음이다.
2010년, 테일러 오트웰이 아칸소주 리틀록 — 실리콘밸리도 아니고 뉴욕도 아닌
미국 시골 도시 — 에서 혼자 7개월 만에 만들었다. 당시 기존 PHP 프레임워크가
너무 자바스러워서 복잡했고, 루비온레일즈처럼 쓰기 편한 게 PHP에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시작이었다.
그 결과물이 지금 JetBrains 조사 기준 PHP 개발자 61%가 사용하는 프레임워크가
됐다. Stack Overflow 조사에서도 전체 개발자 기준 사용률 9%로, 언어를 가리지
않고 상위권이다.
“복잡성의 성당”을 짓지 마라
테일러 오트웰이 maintainable.fm 팟캐스트에서 한 말이 있다.
개발자들은 때로 “쉽게 바꾸기 어려운 복잡성의 성당”을 지으려는 유혹에 빠진다고.
코드는 “단순하고, 버릴 수 있고, 바꾸기 쉬워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프레임워크가 정해둔 방식을 넘어서는 “영리한 해결책”을 찾았다면, 그건 오히려
경고 신호라는 거다. 개발 세계에서 ‘코드 스멜(code smell)’이라고 부르는 것 —
지금은 작동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될 코드의 냄새.
나도 개발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온다. “이거 좀 더 우아하게 짤 수 없을까?”
싶어서 복잡한 추상화를 쌓기 시작하는 순간. 그런데 나중에 그 코드를 다시 보면
나도 이해 못 하는 경우가 생긴다.
테일러는 그걸 15년째 의도적으로 피해왔다는 거다.
13년 부트스트랩, 그리고 첫 번째 외부 투자
흥미로운 건 그의 사업 방식도 코드 철학과 똑같다는 점이다.
라라벨은 2010년부터 2024년까지 13년을 외부 투자 없이 운영했다. 라라벨
에코시스템 — Forge(서버 관리), Vapor(서버리스 배포), Nova(어드민 패널),
Envoyer(무중단 배포) — 을 하나씩 만들면서 수익을 직접 쌓아갔다.
그러다 Accel 파트너 마일스 클레멘츠와 대화하면서 처음으로 시리즈 A 투자를
받아들였다. 투자 규모는 공식 발표 기준 5700만 달러, 한화로 약 850억 원 수준이다.
13년간 거절하다 첫 외부 투자를 받은 이유는 단순했다. 혼자 할 수 있는 속도와
투자를 받았을 때 할 수 있는 속도 사이의 격차가 커졌기 때문이다. 커뮤니티가
100만 명을 넘어서면서, 그 수준에 맞는 팀과 제품이 필요해진 시점이었다.
평범함을 선택한 이유
나는 이 부분이 제일 인상 깊었다.
그는 “나는 꽤 평범한 프로그래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개발자들도 마찬가지라고. 기본적인 문제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이라고.
천재 해커 이미지를 내세우는 대신, 자신을 평범한 개발자로 정의한 사람이
세계 최대 PHP 프레임워크를 만들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면서도 납득이 된다.
프레임워크의 목적이 결국 “평범한 개발자가 좋은 서비스를 빠르게 만들 수 있게
돕는 것”이니까. 만든 사람이 평범함에 공감하고 있어야 그걸 제대로 만들 수
있는 거 아닐까.
1인 창업자로서 나도 비슷한 걸 느낀다. 복잡하게 설계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일단 돌아가게 만들자”는 쪽을 선택할 때 결과가 더 좋았다. 과도한 설계는
결국 나중에 갈아엎어야 하는 기술 부채가 된다.
마무리
850억을 투자받은 창업자의 핵심 원칙이 “평범해야 한다”는 거라는 게 처음엔
웃겼는데, 지금은 그게 제일 현실적인 말로 들린다.
영리한 코드보다 읽기 쉬운 코드. 복잡한 설계보다 바꾸기 쉬운 구조.
화려한 아키텍처보다 지금 당장 돌아가는 제품.
창업도 개발도, 결국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긴다. 그리고 오래 버티려면
복잡성이 낮아야 한다.
테일러 오트웰이 15년을 버틴 이유가 거기 있지 않을까.
더 자세한 내용은 창업·투자 카테고리에서
확인하고, 원문 팟캐스트는 maintainable.fm에서 들을 수 있다.